지금은 박물관인 뤼순감옥을 돌다 보면 역대 형무소장 이름이 걸려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1907년부터 1913년까지 초대 형무소장은 구리하라 사타키치. 안중근 의사가 복역하고 순국했을 당시 형무소장입니다. 구리하라의 딸이 이마이 후사코입니다. 그녀의 8살 때 기억과 안 의사 유해 매장지를 표시한 사진을 바탕으로 2008년 유해 발굴단이 조사를 벌였습니다. 유해 발굴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전문가들은 2008년 발굴이 헛수고였다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유해 매장 후보지 한 곳에 대한 가능성을 지웠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구리하라 형무소장 이후 8명의 형무소장 이름을 지나면 1944년부터 타고지로란 이름이 나옵니다. 일제의 마지막 뤼순감옥 형무소장인 타고지로는 정확히 1944년 5월부터 1945년 8월까지 15개월간 뤼순감옥 형무소장을 역임했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축소 증언이란 평가가 많습니다. 통계 자료에 따르면 뤼순감옥에서 700명이 죽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타고지로의 잔혹한 살인 범죄는 일본 패망일인 1945년 8월 15일 다음 날에도 자행됩니다. 당시 투옥중이던 재소자들을 무참히 살해합니다. 명백한 보복살인입니다. 이 때 살해된 사람 중엔 한인애국단 소속 독립운동가 유상근도 있습니다. 타고지로의 악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일본인 간수들을 시켜 뤼순감옥에 남아 있는 모든 자료를 불태우라고 지시합니다. 8월 16일부터 18일까지 무려 사흘에 걸친 방화로 뤼순감옥에 있던 각종 문서와 기록들은 모두 잿더미로 변해버린 겁니다. 도주하기도 바빴을 상황에서 사흘간이나 감옥 문서를 샅샅이 모아 태웠다고 하니, 불타버린 자료들의 방대한 양과 역사적 가치를 가늠하기 힘들 정돕니다.
중국뿐 아니라 일본 측 자료를 확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일본 정부는 우리의 거듭된 협조 요청에 '안 의사 유해발굴 관련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말에 그치고 있습니다. 이마저도 2010년, 8년 전 얘깁니다. 전문가들은 일본 측 자료들이 외교사료관과 방위성 연구소, 국회도서관에 비공개 자료 형태로 보관돼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중국과 일본에 자료를 요청하는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요청해서 건네받은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자료를 찾을 수 있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정부의 적극적인 의지와 끈질기고 지속적인 외교적 노력이 병행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거라 판단합니다. 여기에 자료 수집을 위한 전담 전문가가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한 얘기겠죠. 이를 위한 예산도 갖춰야겠구요. 가능하다면 남북한과 일본, 중국의 민간 전문가들이 함께 참여하는 안중근 사 유해발굴 상설 기구가 가동하는 것도 검토돼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라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는다면, 순국 108년이 지나도록 고국에 묻히고 싶다는 안중근 의사의 유언을 받들지 못하고 있는 후손들의 면목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취재파일 - 안중근 유해 찾기 키워드]
▶ ① - '감옥서의 묘지'가 어딘가?
▶ ② - 주목해야 할 '둥산포' 묘지
▶ ③ - 최후 형무소장 '타고지로'의 악행
▶ ④ - "안중근 의사는 침관에 누워 계신다"
▶ ⑤ - "어렵고 힘들다"는 건 국민도 다 압니다
▶ ⑥ - 안중근 기념관은 돌아오는데…
▶ ⑦ - 사라진 안 의사 가족의 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