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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반값 묵은 쌀'이 경기미로 둔갑?

[취재파일] '반값 묵은 쌀'이 경기미로 둔갑?

반값 등록금, 반값 아파트… 반값 시리즈가 이번에는 '반값 쌀'로 이어졌습니다. 이번 취재는 우연하게 시작했습니다. 취재원을 만나기 위해 차를 타고 가는데 길가에 쌀을 수북이 쌓아 놓고 파는 사람들을 목격했습니다. 노점 또는 떴다방이죠.

길거리에서 쌀을 파는 것 자체도 신기하고, 이 사람들이 내건 광고판에 나온 가격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쌀 20kg 한 포대 가격이 원래 56,000원인데 35,000원에 판다. 직감적으로 아 뭔가 있겠다 싶었죠. 그래서 다가가서 물어보니 좋은 쌀이고 가격도 싸다고 하고... 경기미는 35,000원, 전북산 쌀은 29,000원에 판다고 하더군요.

사가는 사람도 꽤 있고, 행인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요즘에는 길거리에서 쌀을 파는 사람이 많다고도 하고…. 일단 여기저기 판매하는 사람이 많다면 판매 조직이 있을 거고, 좋은 쌀인데 싸는 이유는 또 뭘까? 머릿속에선 기사가 작성되고 있었습니다. 

일단 혹시 중국산을 국산으로 속여 판매하는 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쌀을 사서 공인기관에 품질 검사를 의뢰했습니다. 며칠 후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국산이 맞다는 겁니다. 맥이 빠지는 순간, 검사원이 던진 한 마디 "2009년산 쌀이 많이 풀린 건 아시죠?" 취재는 이걸 단서로 시작됩니다. 유통경로를 추적해 보면 뭔가 건질 게 있겠다 싶었죠.

첫 출발은 쌀 포장지



자세히 보니 정말 2009년산이라고 찍혀 있었습니다. 쌀을 팔 때 상인들이 저에게 알려주지 않은 사실이죠. 일단 쌀을 도정한 수도권의 한 미곡처리장을 직접 찾아갔습니다. 회사 측은 포장지를 보더니 자신들이 도정한 쌀이 맞다고 했습니다.

35,000원에 팔리고 있다 했더니 말도 안 된다고 합니다. 이 쌀은 정부가 물가 안정을 위해 싸게 내놓은 이른바 '반값 쌀'이기 때문입니다. 올해 물가가 불안하잖아요. 쌀값도 2월에 빨간불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농림부는 올 4월부터 최근까지 2009년산 벼 40만 톤을 공매했습니다. 농협이나 전국의 미곡처리장에서 이 물량을 사들였습니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업체들이 가격이 40kg 조곡 기준으로 23,500원으로 떨어지자 서로 가져가려는 경쟁이 치열해졌습니다. 입찰 경쟁률이 9.8대1까지 치솟았습니다. 세상이 이런 가격은 없었다는 게 양곡업계 종사자들의 얘기입니다.

가격 구조를 추적

물량을 확보한 농협이나 미곡처리장에서 조곡(벼)를 도정하면 쌀이 70% 가량 나온다고 합니다. 산술적으로 보면 조곡 40kg을 도정해 쌀 20kg으로 만들면 생산원가는 대략 17,000원 선. 여기다 포장비, 운송비, 이윤 등을 더하면 도매상으로 넘길 때 20kg 한 포대가 2만 원쯤 된다는 겁니다.

대형 도매상에선 한 포대에 500원 또는 1,000원을 더해 중소형 상인으로 넘기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소매상으로 건너가기도 하고, 아니면 대형마트 쪽으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업계 관행으로 볼 때 쌀 유통구조에서 단계를 하나 거칠 때마다 대략 1,000원씩 마진이 붙는다고 합니다.

농림부가 파악한 바로는 소매가가 대형 마트에서는 대략 24,000원선, 중소형 상가 쪽은 28,000 안팎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취재진이 직접 목격한 떴다방에서는 35,000원, 한 업계 관계자는 자신은 39,000원에 파는 것도 직접 봤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떴다방에 따라 한 포에 1만원 안팎의 폭리를 취했다는 결론이 나오더군요.

경기미라고 해서 비싸게 받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정부의 반값 쌀은 전국 어느 지역에서나 단일가격(23,000원/40kg 조곡)을 적용해 방출했기 때문에 단순 계산상 소매가도 같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운송비에 차이가 생길 수 있는데 운송비를 사실대로 반영했다면 서울에서 팔 때는 운송비가 더 들어간 전북 쌀이 경기미보다 오히려 비싸야 한다는 계산입니다.

남들 따라 했다

떴다방 사무실을 찾아갔습니다. 사무실 안에는 여러 브랜드의 포장지에 담긴 2009년산 쌀이  쌓여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사업에 손을 댔는지 물었더니 자신들도 다른 떴다방이 하는 걸 보고 돈이 되겠다 싶어 따라 했을 뿐이라고 변명을 하더군요. 물론 물가 안정을 위해 정부가 반값에 쌀을 방출했다 사실도 잘 알고 있었고요.

자신들이 파악하기에는 전국적으로 길거리 판매가 이뤄졌다고 말했습니다. 이유야 어찌됐든 소비자들에게 2009년산 쌀이라는 걸 명확히 알려주지 않았고 가격도 높고 경기미라고 비싸게 받은 점 등은 명백한 잘못이라고 시인했습니다.

멋모르고 산 사람만 손해?

과연 쌀 떴다방이 전국적으로 얼마나 성행했는지 판매 규모는 어느 정도일지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취재 중에 만난 사람들이 서울 뿐 아니라 경기도 곳곳, 그리고 지방에서도 쌀 떴다방을 봤다고 하니 쌀 떴다방 사장 말대로 전국적으로 판매가 이뤄진 것은 맞다고 봅니다.

이런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지 농림부에 확인을 요청했는데  정부는 2009년산 쌀 가운데 노점에서 판매되는 양은 많지 않을 거라고 추정했습니다. 반값 쌀은 주로 구내식당 등 대규모로 쌀 소비가 이뤄지는 곳이나 대형 마트에서 팔렸다는 겁니다. 또 쌀이 비싸게 팔려도 가격 책정은 어디까지나 상인의 결정권인데 가격을 문제 삼아 단속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겠냐는 반응이었습니다. 결국 2009년 쌀의 정체를 모른 채 쌀을 사먹는 사람만 억울한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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